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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영화의 7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영국영화의 최근 역사
1970년대
1970년대에는 『1000일의 앤』(1969년), 『공군대전략』(1969년), 빌리 와일더의 『셜록 홈즈의 모험』(1970년), 데이비드 린의 『라이언의 딸』(1970년) 등의 영국 자본·미국 자본을 불문하고, 뛰어난 작품이 제작되었지만, 1970년대는 영국과 미국 양쪽의 스튜디오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대규모 기획사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미국의 프로덕션과 비교하면 구식적인 부분도 있었다.이 시대에 히트한 작품으로는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년), 나일 살인사건(1978년), 에드워드 왕조 드라마 사랑(1971년), 알프레드 히치콕의 프렌지(1972년), 베네치아를 무대로 한 니콜라스 로그의 스릴러 영화 붉은 그림자(1973년), 마이크 호지스 등이 한 영화.이 시기 루 그레이드의 TV제작사 ITC 엔터테인먼트가 영화산업에 뛰어들었지만 5년 동안 여러 편의 성공작과 수많은 실패작을 낳았다.다른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리처드 애튼버러의 전쟁과 모험(1972년)과 너무 먼 다리(1977년)가 있다.
1960년대 브리티시 공포영화 붐은 해머필름스 프로덕션과 아미커스 프로덕션이 미국과의 경쟁에 직면했고 결국 공포영화에서 손을 떼면서 1970년대 중반 종식을 맞았다.악마의 제물(1974년) 같은 미국제 공포영화는 해머프로덕션의 흡혈귀 영화를 진부한 모습으로 보여줄 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그래도 흡혈귀 헌터(1973년)나 현재는 컬트 영화인 위커맨(1973년) 등이 제작됐지만 히트하지 못했다.
해머 프로덕션을 포함해 몇몇 제작사들은 TV 시리즈 제작에 주력하게 됐고, 그런 시리즈의 영화화 작품에서 성공을 거뒀다.또 코미디라고 하면 1970년대에 나타났던 몬티 파이썬을 잊을 수 없다.TV 시리즈에서 출발한 이들의 영화 몬티 파이슨 앤드 홀리 그레일(1975년)과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1979년)은 개봉 때 물의를 빚었지만 다행히 히트했다. 검열이 완화되면서 1970년대에는 물의를 빚은 작품들도 생겨났다.그런 작품으로는 켄 러셀의 육체의 악마(1971년), 샘 페킨퍼의 짚개(1971년), 프랭크 로덤의 안녕 청춘의 빛(1979년),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년)가 있다.
본드 영화는 1974년 007 황금총 든 남자 외에는 70년대 내내 히트했었다.특히 세금 마련을 위해 프랑스에서 촬영된 1979년 007 문레이커는 시리즈 최초로 전 세계 흥행 수입이 2억달러를 돌파했고 본드 영화로는 10년 이상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한편, 몇몇 미국 제작사들이 다시 영국 촬영소를 사용하게 되면서, 《스타워즈 에피소드 4》는 하트퍼드셔의 엘스트리 스튜디오(Elstree Studios)에서, 《슈퍼맨》은 버킹엄셔의 파인우드 스튜디오(Pinewood Studios)에서 촬영되었다.
1980년대
스타워즈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비록 슈퍼맨II 같은 미국영화가 영국에서 제작되긴 했지만 1980년대는 영국영화계에서 가장 불황이었다.1980년에는 미국 등과의 합작품도 포함해 전년의 절반인 31편의 영화밖에 만들어지지 않아 1914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이듬해 그 수는 더욱 줄어들어 2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을 뿐이다.그러나 골드크레스트 필름스(및 프로듀서 데이비드 퍼트넘), 채널4, 핸드메이드 필름스,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스 등의 제작사에 의해 영국 영화는 다시금 그 기세를 올리고 있다.퍼트넘의 전부는 빌 포사이스(로컬 히어로 꿈에 산 남자 1983년), 휴 허드슨(불의 러너 1981년), 롤랜드 조피(킬링필드 1984년), 앨런 파커(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1978년), 리들리 스콧(듀얼리스트/결투자 1977년) 등 재능 있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2년 퍼트넘이 프로듀싱한 불꽃러너가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수상했을 때 원작자이자 영화판 각본을 쓴 콜린 웰랜드는 the British are coming!(폴 리비어의 말을 인용)이라고 선언했다.이듬해 간디(골드크레스트 제작)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이 말은 더욱 진실해졌다.이들 작품의 성공으로 데이비드 린의 마지막 영화 인도로 가는 길(1984년)과 EM 포스터 원작의 전망 좋은 방(1986년) 등 제작비가 많이 드는 작품도 만들어지게 됐다.그러나 여타 미국시장을 겨냥한 대규모 예산의 영화들은 실패로 끝났고 황금종려상을 받기는 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던 미션 등으로 골드 크레스트는 큰 타격을 입었다.또 많은 재능 있는 영화제작자들이 할리우드로 거점을 옮겨버렸다.
핸드메이드 필름스(조지 해리슨 소유주 중 한 명)는 길고 더운 주말(1980년) 위드네일과 나(1987년) 등의 작품을 국제적으로도 성공시켰다.핸드메이드 필름스는 원래 몬티 파이썬의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제작을 위해 설립돼 있기 때문에 몬티 파이썬 멤버가 관련된 다른 작품도 만들게 됐다.1980년대에도 몬티 파이슨의 영향은 컸고 테리 길리엄의 판타지 영화 반데트 Q(1981년)와 미래세기 브라질(1985년), 또 존 클리즈가 출연한 완다와 다이아와 상냥한 놈들(1988년)은 히트했다.
TV제작사 채널4도 영화 제작에 나서 스티븐 플리어스(마이 뷰티풀 랜드렛) 마이크 뉴웰(댄스 위드 어 스트레인저) 등의 감독을 배출했다.또 미국에서 활동하던 존 부어먼은 영국으로 돌아와 『전쟁터의 작은 천사들』(1987년)을 제작했다.스티븐 울리의 팰리스 픽처스(Palace Pictures)는 하닐 조던의 늑대들의 혈족(1984년)과 모나리자(1986년)를 성공시켰다.다른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루이스 길버트의 리타와 대학교수(1983년)와 피터 예이츠의 드레서(1983년)가 있다.
1990년대
1989년에는 영국 영화계의 불황이 바닥에 이르렀다.그러나 1990년대 초 관객 동원수는 꾸준히 늘어 머천트 아이볼리 프로덕션의 하우스 엔드(1992년)와 해의 아쉬움(1993년), 리처드 애튼버러의 찰리(1992년)와 영원한 사랑에 살아라(1993년), 닐 조던의 스릴러 크라잉 게임(1992년) 등 몇 편의 히트작품이 나왔다.크라잉 게임은 영국에서는 히트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미라맥스가 배급해 인기를 끌었다.미라맥스는 이 밖에도 BBC가 만든 드라마 매혹적인 4월(1992년)을 배급했다.헨리 5세(1989년)와 헛소동(1993년) 등 케네스 브래너의 셰익스피어 영화도 눈길을 끌었다.
또 1994년 영국 만세!의 성공으로 아직도 전통 코스튬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음이 밝혀졌으며 이어 언젠가 맑은 날에(1995년), 사랑의 어둠 사랑의 빛(1995년), Emma 엠마(1996년), Queen Victoria 지상의 사랑(1995년), Emma 엠마(1997년), Queen Victoria 지상의 사랑(1997년), 비둘기들.앤서니 밍겔라의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년)를 포함해 이들 작품 중 몇 개는 미라맥스가 만들었다.엄밀히 따지면 미국 자본의 영화이지만,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하며 영국 영화계에 명성을 떨쳤다.
당초 예상을 깨고 대박을 터뜨린 리처드 커티스 각본의 포 웨딩(1994년)은 전 세계적으로 2억440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이후 영국이 무대인 로맨틱 코미디 슬라이딩 도어(1998년)와 노팅힐의 연인(1999년)이 제작됐다.이들 작품을 제작한 워킹 타이틀 필름(Working Title Films)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제작사 중 하나로, '빈'(1997년), '엘리자베스'(1998년), '콜렐리 대위의 만돌린'(2001년) 등을 발표해 나갔다.
코미디 영화에 대한 수요도 커져 브라스!(1996년)와 풀몬티(1997년) 등이 히트했다.$00 $00의 제작비로 2억57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린 스튜디오는 소규모 관련 회사를 설립해 저예산으로 흥행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됐다.
1990년대 후반, 새로운 National Lottery를 통한 공적 자금이 영화계에 제공되면서 영화 제작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그러나 많은 작품은 실패로 끝났다.그중에는 가이 리치의 블랙 코미디 록 앤드 투 스모킹 배럴스(1998년)와 인상(2000년)을 흉내 낸 듯한 작품도 있었다.
법적인 이유로 6년간 중단됐던 본드영화 17편 007 골든아이가 개봉됐다.늘 촬영하던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빈자리가 없자 하트퍼드셔에 있던 롤스로이스사 공장에 새로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990년대 중반, 다시 미국 제작사가 영국에서 촬영하게 되었고, 《인터뷰 위드 뱀파이어》(1994년), 《미션 임파서블》(1996년), 《라이언 라이언》(1998년), 《스타 워즈 에피소드 1》, 《팬텀 메너스》(1999년), 《햄냅트라》(1999년)가 제작되었다.또 프랑스 자본의 피프스 엘리먼트(1997년)도 영국에서 제작됐는데, 당시에는 지금까지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중 가장 예산이 많이 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채널4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마이크 리는 현대 영국의 노동자 계급을 그리는 네이키드(1993년)와 비밀과 거짓말(1996년)을 감독했다.특히 비밀과 거짓말은 높은 평가를 받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또 작가, 영화감독, 프로듀서로 팀을 이룬 존 호지, 대니 보일, 앤드루 맥도널드 세 사람은 샬로우 글레이브(1994년)와 트레인스포팅(1996년)을 제작해 성공을 거뒀다.
또한 1990년대에는 웨일스 영화에도 진전이 있었다.1997년 제작된 카멜레온은 웨일스어 영화로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상업적으로 극장 개봉했다.1999년 개봉한 요안 그리피즈 주연의 웨일스 영화 "Solomon and Gaenor"는 제72회(1999년도) 아카데미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